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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련된 감성과 질박한 수사[고두석 시인의 작품세계]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10-10-14 16:06     조회 : 824    
단련된 감성과 질박한 수사
―고 두석 시인의 작품세계―


김 병 희 (문학박사)

1.
바야흐로 모든 것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따스하기만 하던 햇살이 어느덧 뒷덜미에서 뜨겁게 이글거리고, 새로 첫 장을 넘긴 도톰하던 달력도 여러 장 뜯겨나간 마당에, 신록이 무르익어 풍성한 초록은 우리의 눈자위를 싱그럽게 만든다. 시인들이 작품을 구상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쯤일까. 여름이란 계절이 사방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들쑤셔서 작품에 몰두하기 어려울 듯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흥이 절로 터져 나오리 만큼 강렬한 계절이라 그 풍류가 다 시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오래 묵혀두고 숙성시킨 발효음식이 있는가 하면, 뜨거운 기름에 방금 튀겨낸 듯 바삭한 먹을거리도 풍미가 좋으니, 맛에 관한 한 그 순위를 매기기가 곤란하다. 시조 작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콩알 하나하나 골라내어 공들여 늘어놓는 정성이 있는가 하면, 한두 개 비틀어 앉히고 전체 틀로 밀고나가는 배포도 마주치게 된다. 어느 쪽을 택하든 무르익게 마련이리라. 갈고 닦고 되뇌고 어루만지면서 시심도 깊어지고 기량도 성큼 발전될 것이다.
시인들의 행보를 가만히 주목하다 보면 저마다의 개성과 함께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 애쓴 흔적도 발견하게 되고, 아슬아슬하게 다스려 넣은 고집도 마주하게 된다. 뚝심으로 밀고 온 세월 때문일까. 인고의 세월 뒤엔 어느 덧 자신을 닮은 큰 바위 얼굴이 형체를 드러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그저 담담한 눈으로 오래 오래 지켜봐주는 것뿐이리라.

고두석 시인의 작품들은 자기성찰에 초점을 맞추고 무게를 싣는다. 시적 화자의 사유와 고뇌가 일인칭으로 즉각 전달되는 데서 시의 힘과 매력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시인이라는 호칭도 쓰는 것일 게다.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유려한 시어도 다듬기보다 투박하고 진솔하게 툭툭 털어 던져놓은 듯한 질감이 고두석 시인의 작품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너무 가벼운 것도, 지나치게 진지한 것도 부담이 될 터이니 중도를 택하면 작히 좋을까마는, 우리가 시조를 짓고 문학을 고민하는 일 자체가 부담 없이는 곤란한 것이라서 아무래도 자꾸 마음이 오락가락한다. 그럴 때 한 발 쑥 내미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리라. 고두석 시인의 호기에 기대어 오솔길을 따라가 보자. 어디쯤에 꽃을 심어 두었는지, 어느 쪽으로 물길을 내었는지 차근차근 둘러봐야겠다.     

구부정한 언덕길과 얼굴 맞댄 낮은 처마
기우는 창문 통해 보이는 작은 하늘에
별처럼 돋아나고 있는 늘그막의 작은 꿈.
                        -<시조방에서.1> 전문-

“시조방”이라는 표현이 눈에 설면서도 행간을 지나치려면 사이사이에서 상념들이 튀어 오른다. 시조와 시조시인과 시조인의 공간이 한데 어우러져 이미지가 중첩된다. 고두석 시인은 시조인의 창을 통해 꿈을 본다. “구부정한”, “낮은”, “기우는”, “작은”, “늘그막” 같은 시어들을 통해 한껏 낮추고 약해진 마음으로, 그러나 별을 본다. 많은 기우는 것들 사이에서 별이 돋아나는 것을 보고, 거기에 꿈을 싣는다. 시조의 지평이 아직 왜소하고 고독할지라도 꿈꾸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용기백배한다. 시조의 원형을 유지하며 차분히 정돈해 갈무리한 작품에서 시인의 심사를 고스란히 전달받은 듯 마음이 숙연해진다.

명치끝 치민 울화(鬱火)
차마 어쩔 수 없어

손끝으로 꼭꼭 눌러
술대로 짓이긴다

배신감
분노의 소리
튕길수록 커진다
        -<거문고> 전문-

<거문고>는 가야금과도 달라서 흔히 접하기 어려운 악기다. 무겁고 둔중한 소리라고 해야 할까. 시인은 거문고 소리를 “울화”에 빗댄다. 명치에 맺힌 울화처럼 폐부로부터 끌어올려진 소리를 튕기고 튕기다 보면 분노가 잦아들까. 시인은 “튕길수록 커진다”고 호소하지만, 그러는 사이 그것이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고 밤이 이슥할 때쯤엔 서서히 잦아들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리라. 울화도 분노도 그 자체보다는 키우고 다스리는 통로가 문제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짓이기고 튕기면서 음의 고저장단에 맞춰 폭발하다 사그라지곤 하는 게 곧 음악임에야.

빛인가 어둠인가
그 경계는 어디인가

회의와 갈등으로
범벅이 된 회색지대

정도(正道)로
버티고 선 가로수가
지기(知己)처럼 반갑다     
        -<새벽.4> 전문-

경계의 모호함, 시작과 끝의 혼돈, 빛과 어둠에의 경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자리매김하는 일이 갈수록 지난하게 여겨진다. 새벽은 문학에서 시작과 긍정의 상징이다. 바야흐로 눈의 식별이 가능해지고 정지해 있던 사물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시인은 먼저 일어나 새벽의 초입에 가지런히 형태를 드러내는 가로수를 본다. 변하지 않는 것, 쉽게 사라지지 않은 것에의 갈망은 나이 들수록 본능적으로 취하게 되는 방어 자세인 것 같다. 헬만 헤세(H. Hesse)는 안개 속을 걸어가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들로부터 자기만이 가만히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된다고 노래했다. 모호함 속에서 고뇌하며 자유롭게 길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해도, 어느 지점에 이르면 지표가 될 나무를 발견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리라. 고두석 시인처럼 새벽의 여명 속에서 자신의 의지 나무를 식별해 낼 수 있다면 좀 더 부지런을 떨어도 좋을 것 같다.     

2.
고두석 시인의 작품에서는 특히 제목들이 눈에 띈다. <까치설날>, <내 하루>, <내 안경> 등 마치 동심의 세계를 다루듯 일반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주체적 감정을 강조한다. <까치 설날>은 설화 속 이야기를 선경(仙境)으로 옮겨놓은 듯 이미지가 눈에 선하게 펼쳐지도록 만든다. 몽롱한 여운을 담은 동영상처럼 재생되면서 태초에 세상이 시작될 때 이러했을지 되새기게 한다. 그렇게 새 날들이 시작되고 한 해가 열리는 거라고 영물인 까치를 앞세워 길을 닦는다.

한 해가 종적 없이
사라진 하늘 끝으로

잠적한 그믐달이
날 새워 트는 여명

길일(吉日)을
밝혀보고자
눈길 밟고 찾아온 날
      -<까치설날> 전문-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설날은 오늘이래요.…” 어릴 때 따라 부르던 동요의 구절인데 왜 이리도 귀에 생생한지, 아마도 인간의 원초적 심성은 모두 닮은꼴인 모양이다. 자정을 지켜 카운트다운 하며 맞이하는 계산된 시간으로서의 새해가 아니라, 우리들 마음속에 미리 다가와 기다리고 있는 무수한 길일(吉日)들에의 열망이다. 그런 비움으로 인해 각박한 세상에의 두려움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처럼 시작은 축복이며 탄탄대로를 향한 희망이다.

발 동동 구르면서
줄 서있는 일감들을

잠시도 안 멈추는
시간 속에 넣고서

짤순이 돌려대듯이
꼭꼭 짜는 내 하루
        -<내 하루> 전문-

<내 하루>는 그야말로 시간에 쫓기면 동분서주하는 현대인의 일상이자 시인의 하루를 하소연하고 있는 듯하다. “발 동동”구르며 짤순이처럼 “꼭꼭 짜는” 하루라니, 콩쥐가 울상 지으며 늘어놓는 푸념과도 같다. 참새라도 몰려와 도와주면 좋으련만, 모두가 바삐 돌아가는 터라 다들 제몫을 하기에 여념이 없다. “짤순이”라는 생뚱맞은 문명의 이기가 그 속도를 짐작하게도 하지만 어쩐지 안타깝기보다는 시인의 허튼 응석으로 여겨져 웃음을 머금게 된다. 그렇게 돌아가는 일상의 틈을 비집고 시조 편들이 들어앉아 있으니 배부른 투정이라고 치부해 둘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속도와 무게를 이기기 힘들 때, 한번쯤 쏟아내 버리라고 옆에 와서 기다리고 있는 문학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리(私利)에 밝지 못해
더듬더듬 살아왔네

도수를 더 높여야
세상이 뵌다는데

남들은 
높이건 말건
고집불통 내 도수(度數).
              -<내 안경> 전문-

“내 도수”로 세상을 보는 고집불통이라는 표현은 시인의 역설이다. 사리에 밝지 못하다는 것도, 더듬더듬 살았다는 것도, 도수가 낮아 안 뵌다는 것도 영악한 세파에 대한 저항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했던가. 세상의 가파른 변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옹호하고 지지할 수 있는 자신감은 이 시대의 모든 이가 선망하는 덕목일 것이다. 휩쓸리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굳건히 자기 땅을 디디고 서는 힘은 치기도 객기도 아닌 용기다. 느릿느릿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면서 구석구석 남아있는 야생화를 돌아보는 일도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해 줄 것이다. 시인이 투박하게 던지는 권유가 느림의 미학을 생각하게 한다.

3.
사람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과연 어떤 색깔들이 호명될까, 또는 스스로 어떤 색이기를 소망할까. 고두석 시인의 어머니 색깔은 홍색이다. “허리춤에서 꺼내놓은 홍시 한 개”가 어머니의 과거와 현재다. “고향 빛”, “노을”, “홍시”의 빛깔이 뭉뚱그려 어머니를 말한다. 그렇게 붉고 그렇게 강렬하고 진한 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었던가. “어릴 때 장날”로부터 시작하여 “남몰래 경로당에서 남겨 오신” 홍시의 역사는 우리들 생애 전부다. 어머니를 향한 효심이나 애틋한 감정표현보다도 노모의 내리사랑을 가만히 응시하는 시인의 눈매가 더 시리다.

쟁반에 담긴 빛깔 노을처럼 곱구나
고향 빛을 닮았는지 紅潮를 띠고 있네
어머님 허리춤에서 꺼내놓은 홍시 한 개

어릴 때 장날마다 사다주던 홍색 사탕
아흔두 살 지금까지 그 색깔 변함없네
남몰래 경로당에서 남겨 오신 자식 몫
                        - <어머니 색깔> 전문 -
 

세상 천지에 오로지 나를 향해 붉은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다니… 그것만으로 세상은 아름답다. 추억할 것이 있는 모자, 아직 나눌 것이 있는 모자의 진솔한 감정표현이 흐뭇하다. 절절 끓는 연민도 옭죄어 불편하고 시류 따라 넘치게 이성적인 것도 불편하니, 짐짓 모른 체하며 서로 끄덕여주는 정도면 어떨까. 고두석 시인의 <어머니 색깔>은 정작 어머니보다도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가 언제까지 홍시 한 개를 품어다 주는 부모일 수 있을지, 아흔 두 살 변함없는 어머니의 단심이 부럽게 느껴진다. 우리가 받았던 것과 우리가 주고 있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강물은 흐르는데 떠나지 못한 기억들이
산책길에 한 줌씩 그리움으로 출렁이다
낙일(落日)에 노을빛 그림자로 질펀하게 깔린다

서산으로 기울수록 내 그림자 길어지고
사는 날이 많을수록 서러움 불어나서
물길이 강둑을 적실 때마다 허전함만 남는다

매일 와서 익혔건만 올 때마다 낯선 풍경
산다는 건 늘 새롭게 적응하는 것이라고
철새도 날개를 적셔가며 그렇게나 외치더니

움켜쥔 물방울들 죄다 빠져나가고
앉았다 일어설 땐 빈손만 허허로워
마침내 헛되고 헛되도다 한 구절 깨닫는다
                        - <해질녘의 탄천> 전문-

고두석 시인의 작품 중 유난히 길어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해질녘 탄천>은 그 제목에서도 짐작되듯 덧없이 흘러가는 것에 대한 회한을 담고 있다. 황혼이란 되돌릴 수 없는 죄업처럼 우리를 무겁게 한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간 물살을 어쩌지 못한다. 시인은 “외로움”이니 “서러움”이니 “허전함”이니 너스레를 떨지만, 빈손 털고 일어나며 굳건히 마음 갈무리를 해둔다. “헛되고 헛되도다”, 오래 미뤄두었던 상처를 재삼 돌아보듯 그렇게 수긍하며 자유로워지려 한다. 누누이 들어왔겠지만, 드물지 않게 보아도 왔겠지만 황혼녘의 쓸쓸함이란 거부하기 힘든 마력을 가지고 있다. 황홀한 듯 처연하고, 참담한 듯 찬란하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든다. 자기 연민에 휩싸이기도 하리라. 그럴 때마다 시인의 다짐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지만 막상 피부에 와 닿을 때 꺼내 볼 수 있도록 마음 한 갈피에 예비해 둬야겠다.

고두석 시인의 작품들은 애써 다듬고 윤을 냈다기보다는 질박하게 있는 그대로 마음의 자태를 드러낸다. 시조 한 수에 담을 수 있는 딱 그만큼만 사려 놓는다. 삼엄한 진리에 경사되지 않고 화려한 수사도 없이 담담한 호흡으로 삶의 중심을 향해 다가든다. 시인으로서의 오만함도, 독특함을 추구하는 일탈의 에너지도 다스려내고 무게중심을 잃지 않아 우리를 안심시킨다.
이제 여름이다. 태양의 열기로 땅과 사람들이 들끓는 여름. 그렇게 우리가 살아나가듯 시조도 내성이 생겼을 터, 또 한 계절을 감내하며 나무 그늘도 발견하고 뜨거운 추억도 풍성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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