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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지형 시인의 작품세계
  글쓴이 : 운영자 날짜 : 10-10-14 16:51     조회 : 1256    

어젯밤 비가 와서 무슨 말을 했기에 오늘 아침 꽃들이 쓰러져서 울까요
-최지형 시인의 작품세계-

정경은(문학박사)



한 시인이 있다. 그녀는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곳을 사랑한다. 그녀는 산을 좋아하여 자주 오르며, 산에서 들리는 소리와 풀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길가에 핀 꽃이나 정원에 핀 꽃들과도 눈을 맞춘다. 산사에서 흘러나오는 승려들의 음성에도 귀를 열어둔다. 또한 추수 때와 저무는 들녘이 마치 친구 처럼 그녀의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 어느 때고 불러낼 수 있없다. 그녀의 가슴에는 지워지지 않는 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정해진 공간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사방에서 다가온다. 그녀가 이런 사람이 아니어도 또는 이런 사람이어도 상관은 없다. 어떻게 만나지도 않은 최지형 시인을 추측해볼 수 있을까... 시를 읽어보면 시인을 안다. 이렇게 자신을 규정하는 것에 시인은 섭섭할지도 모르지만 시를 읽고 난 후에 시인의 생각과 삶과 생애를 맞추어보는 즐거움은 독자에게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시조는 삶을 대면하고 있는 그녀의 자세를 보여준다.

한 길만 생각하며
마음에 십자가를 세우고

타오르는 소망 앞에
맨손으로 오는 바람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방황하지 않는다
- 무수한 시도

흔들림 없이 한길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시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온 시인, 맨손으로 가진것이 없어도 방황하지 않으며 가정과 삶과 시조의 길을 걸어온 시인이다. 그래서 ‘절개만은 지켰기에 / 무릎 꿇는 일도 없’(달)었고 앞으로도 없을 시인, 그리고 무수한 시도 끝에 시의 우물에서 많은 시상들을 끌어 올리고 동시조의 영역도 개척해가는 시인이다.

1. 어머니와 허수아비
최지형 시인의 시는 연작시가 많다. 가장 많은 연작 시조의 순서대로 보면 <풀꽃>이 30편, <어머님>이 30편, <등반>이 26편으로 많다. 다음으로 <허수아비> 14편, <별빛> 12편, <봄> 11편, <가을> 9편, <사랑> 9편, <겨울잡초> 8편, <세월> 7편, <산> 7편, <불면증> 4편의 순이다. ‘꽃’이나 ‘어머니’ ‘산’에 관한 시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에 관한 시는 제목으로만 보아도 30편에 달하지만 시조의 곳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묘사와 생각이 많으므로 최지형 시인의 시조를 관통하는 소재와 주제는 어머니라고 말 할 수 있다. 시인에게 어머니는 꽃과 같은 꽃이다. 특히 어머니의 말씀은 ‘연꽃’(어머니 1)과 같다. 연꽃이 가진 상징성을 굳이 나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꽃의 의미를 안다. 어머니는 깨우치고 가르치며 온갖 철학의 세계로 이끄는 존재이다. 어렸을 때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에 대해, 자라면서는 인간을 포용하고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나이 들어서는 몸소 죽음과 삶에 대해 깨닫게 한다. 사랑과 훈계를 균형 있게 조절할 수 있는 이만한 스승은 흔하지 않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끊임없는 생각이 곳곳에서 어머니에게로 길을 튼다.

드릴 것 너무 많아 못보내고 있습니다
(중략)
아직도 썩지 않은 슬픔 하나 남았습니다
참회의 눈물에 고이 접어 보내오니
어머님 거기 강물에 던져두고 지내소서
- 어머님 2 - 이승의 편지

이승에서 아무리 편지를 써도 저승으로 보낼 수 없다. 그 곳이 얼마나 먼 곳이기에 그럴까. 아니면 어머니가 그곳의 찬란함과 아름다움에 젖어 이승의 나를 잊어버린 것이기도 한 것일까. 어머니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화라도 하지. 평상시처럼 전화해서 나의 안부라도 물어주지. 그러나 어머니는 너무 멀다. 나는 아직도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았다. 내겐 아직도 썩지 않은 슬픔이 남아있다. 참회의 눈물은 강이 되어 흐른다. 어머니가 다시 살아오신다면 정말 잘 할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시지 못한다. ‘내 너를 보고파서 / 흰 눈으로 오라 했건만’(겨울연가) 그래서 어머니는 꽃 속에 비속에 낙엽 속에 있다. 나의 참회의 눈물을 어머니는 보고 계시는 것일까. 어머니 나의 마음을 편지로 보내오니 그 강에 던져두고 지내소서...
어머니에게 혈육은 어떤 어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입속에서 밥과 함께 ‘지끈!’ 씹히던 돌이 아니었을까.

해묵은 그 일들이
화끈 달아 오르면

돌로만 씹힌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 혈육

돌을 씹었을 때의 그 난감함. 순간 뱉을지 안 뱉을지 고민해야 한다. 어떤 때는 꿀꺽 삼키기도 한다. 물론 즉시 밖으로 나가 마당에다 뱉어낼 때도 있지만... 나도 어머니에게는 밥 가운데 씹힌 돌과 같았을 것이다. 나의 말과 나의 행동 모든 것이 돌이었다. 그래서 나는 참회한다. 어머니는 살점을 떼어 아이들에게 준다.

눈발처럼 내리는 / 너의 살점들이 - 가을 나무에게
가을 밤새 우는 비에 살 한 점 저며주고 / 눈썹 밑 아린 사랑아 낙엽 되어 떨궈 가네 - 잎 떨군 나무

‘붉은 혼 한 자락이 살집 좋은 햇살 안고’(오월 바래봉)와 같은 시에서 발견되는 살점의 이미지는 자식을 위해 자기의 살점을 뚝뚝 떼어주는 어머니의 사랑과 같다. 어머니 혹은 시인은 ‘허수아비’에서도 발견된다. <허수아비> 연작에서 허수아비는 외로운 존재이지만 상대를 향한 배려를 함께 가지고 있다. 마치 어머니처럼... 나는 딸이기도 하지만 내 자식들에게는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마도 엄마가 없으면 슬프단다’ 라고 말하는 딸과 어머니와 허수아비와 시인은 겹쳐친다.

벼이삭
출렁이는
바람 속에 외다리

그 많은 메뚜기
짝지어 보내고

새소리
떠난 들녘에
혼자 섰는
외로움.
- 허수아비 4

벼이삭은 마치 딸들처럼 자유롭게 출렁인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와서 출렁이고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출렁인다. 그런 가운데 홀로인 허수아비는 더욱 외롭게 ‘외다리’로 서 있다.  한 곳에 풍경화처럼 서 있을 뿐인 허수아비는 흔들림이 없다. 농부는 메뚜기를 잡고 새는  허수아비에게 쫓으라고 세워 놓는다. 농부가 잡지 못한 메뚜기가 허수아비의 몫은 아니다. 메뚜기는 허수아비보다는 많아서 외롭지도 않지만 허수아비는 마치 부모가 자녀들을 보내듯이 짝을 지어 보낸다. 이름을 잘 지어야 한다. 외로운 허수아비는 이름자체가 모순적인 이율 배반성을 가지고 있다. 즉 쫒는 자로서의 기능과 모으는 자, 자애로움의 ‘아비’ 즉 부모이다. 그래서 메뚜기나 새도 쫓을 대상은 되지 못한다. 새를 쫓는 것도 농부에게 주어진 일이 된다. 메뚜기도 제 짝을 데리고 떠나고 새소리마저 떠나 허수아비는 더 외롭다. 허수아비는 눈이 없었을까. 밭주인은 허수아비에게 눈은 부여하지 않았는가보다. 새는 모양이 아니라 ‘소리’이다. 그렇다면 귀는... 이라는 지점에서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눈이 없는 허수아비에게 무슨 정성으로 귀를 그러주었을 것인가. 여기에서 허수아비는 대상이 되고 보고 듣는 것은 시인이 된다. 시인은 외로운 들녘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허수아비와 들을 보고 있다. 허수아비는 짝지워 주는 매파이기도 하지만 때론 문지기가 되기도 한다.

소슬한
바람 속에
천연한 문지기로 서서
- 허수아비 10

가을은 과실과 곡식이 풍성한 계절이지만 가을 들녁에서 이삭이 베어지고 나면 황량해진다. 나무에서 과일을 떨구고 나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 쓸쓸하기도 한다. 이러한 계절에 바람은 소슬하게 분다. 구슬프고 애달프다는 뜻을 가진 ‘처연한’ 슬픔이라는 말이 있다. 자연스럽다는 말도 있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자연과 너무나 어울린다는 뜻인지. ‘천연한’을 자연스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허수아비는 바람 속에 천연한 슬픔을 가진 ‘문지기’이다.  가을과 겨울의 사이에 있는 문의 문지기이다. 계절과 계절의 문지기는 허수아비나 나무와 같은 것들이다. 가로수는 ‘여름이 가버리고 / 가을이 와 있다’(가을 4)는 소문을 듣고 큰 길가로 나가 산들산들 마중한다. 새를 쫓느라 마지막 절규까지 목이 쉬어버린 들녘에 겨울은 서서히 ‘안개 걷고 일어서’(겨울 들녘 7)는 중이다. 문지기는 지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허수아비는 계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표시목으로서의 기능에 만족해야할 것이다. 

2. 꽃과 수다와 밀서
최지형 시인은 ‘군자란, 매화, 도라지 꽃, 동백꽃, 유채꽃, 능소화, 찔레꽃, 등나무 꽃, 나팔 꽃, 장미, 코스모스, 들국화, 국화, 질경이꽃, 채송화, 상상화, 달맞이꽃, 인동초’ 등등 꽃에 관한 시를 많이 썼는데 꽃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도 많지만, 사물과 형상을 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이야기 꽃’은 쑥쑥 자라 새가 되고 (인생은 물레바퀴), 눈물겨운 추억은 ‘꽃’이 되고 (이제서야), ‘꽃잎이 된 친구’는 달밤에 꽃잎 날듯이 곱게 떠나고 (꽃잎 된 친구야), 세월은 ‘풀꽃 ’(풀꽃 같은 세월)과 같다. ‘이야기’ ‘추억’ ‘세월’이 어떻게 꽃이 될까. 이야기와 추억과 친구와 세월은 시인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다. 이것들은 과거이며 소중한 것이며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대상들이다. 시인은 소중한 것들을 ‘빗질’하여 꽃으로 곱게 피워낸다.
다음과 같은 꽃들 앞에서는 그 꽃된 이유를 가만 되물어야 한다.

천리가 / 무사했으니 / 남은 이승 꽃이로세 - 늦꽃
누구나 가슴에 숨어 핀 / 꽃 하나쯤 있을게야 - 불면증
누구도 내줄 수 없는 소중한 꽃자리 - 채송화

저승꽃은 사람에게 핀다. 그러면 이승꽃은 무엇일까. 불면증을 앓고 있는 가슴에 숨어 핀 꽃은 무엇일까. 채송화의 꽃자리란 무엇일까. 나는 알 수 없지만 최지형 시인은 꽃들은 수다스럽기 때문에 다 알 수 있다. 

들녘의 수다스러운 / 바람이 놀고 있다 - 구름의 존재
햇살 한줌 끌어 안고 / 수다 떠는 숲이 될까 - 나는 바람이 될까
웃음을 못 참는 개나리 수다 터져나온다 - 개나리
넋두리가 웃자라서 / 억새꽃이 만발했다 - 부부 3
당신의 숨소리가 / 만 가지 말인 것을 - 그대가 떠나던 날

숲이나 꽃이 수다를 떤다. 시인은 숲과 꽃의 웃고 말하고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래서 진달래는 ‘북풍으로 진통 끝에 / 툭툭 터진’(바람과 진달래)다. 들녘의 바람은 수다스럽다. 들녘엔 아무것도 없어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을 듯한데, 아무것도 없기에 바람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온갖 것들에 부딪혀 소리를 낸다. 숲은 또 얼마나 수다스러운가. 바람이 일 때 마다 새가 드나들 때마다 비가 올 때마다 머리를 하늘에 놓고 뒷모습을 반짝거리며 마냥 즐거운 소리를 낸다. ‘봄비에 / 펴지 못하면 / 어느 비에 펼건가’(어느 날의 봄비 3- 오해로 엉킨 인연)라며 개나리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넋두리란 하소연의 의미가 더 짙다. 아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한 억새꽃의 넋두리가 필요 없이 웃자라서 만발한다. 병을 앓으며 몇 번의 사경을 헤맨, 말을 하지 못하는, 숨소리와 눈빛만으로 이야기를 하는 환자의 숨소리마저도 만 가지의 말이다. 아이들이 또한 얼마나 수다스러운가. 깔깔대는 웃음소리마저도 수다스러울 때가 있다. 어른은 잘 웃지 않고 수다스럽지 않다. 알고 있는 것을 말할 뿐이다. 그러나 아이들과 자연은 그대로 수다스럽다. 아이스러운 생각은 물소리도 ‘구슬치는’(약수터에서)놀이의 소리로 듣는다.
자연이 수다스러운 반면 때로는 비밀스러운 말을 속삭이기도 한다. <겨울의 밀서>, <밀서>, <바람의 밀서>, <씨앗의 밀서> <봄의 밀서> 와 같은 제목으로 密書는 주고받아진다. 밀서란 은밀히 건네는 연서나 음모가 담긴 편지가 아니던가. 겨울과 바람과 씨앗이 밀서를 보낸다. ‘햇살이 / 비밀처럼 건낸 말’(봄 9, 산까치)이 밀서이다. 그들은 땅에 비밀하게 편지를 보낸 다음 ‘흙이며! / 꿈꾸는 씨앗 깨우고 / 빠짐없이 다 읽으소서’ (봄의 밀서)라며 빠짐없이 ‘읽으라’고 한다. 그것은 씨앗이며 바람이다. 다음 해 봄 그 밀서들은 마치 초로 쓴 글씨처럼 선명하게 피어날 것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읽어야 풍성한 싹과 열매와 꽃이 핀다.

계절의 수레바퀴
벗어나지 못한 그대

바람이 썼다 지운
恨 한 잎 보내오니

눈물만
흘리지 말고
꿈에서도 읽으소서
- 낙엽의 밀서

계절은 항상 수레바퀴처럼 돈다.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그리고 겨울로 다시 봄으로 낙엽은 이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변함이 없는 궤도를 고민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항상 거스르고자 하는 심성을 지녔으므로 인간만이 ‘삼십년도 더 써버린 세월’(서울거리에서)을 두려워하고 고뇌한다. 그러나 인간 역시 자연의 순리를 완전히 거스르기는 어렵다. 시간이 관건이다. 바람은 왜 ‘한’을 썼다가 지웠을까. ‘한’ 한 잎은 바람의 밀서이기도 하고, 낙엽의 밀서이기도 한다. 이별에 슬퍼하지만 말아라. 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 헤어진 사람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날마다 아침이면 생각나는 어머니도 볼 수 있다.
원래대로라면 식물이 입이 없고 동물은 입이 있어야 하나 식물은 수다를 떨고, 수다스런 생각들은 말없는 동물이나 광물이 된다. 심지어 입이 없다. 생각이나 기억은 새가 되고 돌이 된다. ‘별빛을 따 묵고도 / 시침때는 산까치’(안녕을 비는 아침)에서는 별빛도 열매가 된다. 새는 별을 쪼아 먹기도 하다가 밤을 쪼아 먹는다. 쓰라린 기억들은 입이 없는 새가 된다. 수다스럽던 것들이지만 입이 없어 떠들지 못한다. 입 없는 새가 머릿속을 비상하다가 가슴에 둥지를 틀고 머리 속의 생각이 가슴에 새겨진다. 옛 말에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가슴에 새겨진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고속버스는 그리움도 없지만 심장(서울행 고속버스 - 세미나에 가면서) 속에 나를 싣고 서울로 간다.
 
쓰라린 기억들이
입 없는 새가 되어

머리 속을 비상하다
가슴 속에 둥지 틀고

긴 밤을
쪼아먹는 너
어이 그만 못떠나고
- 불면증 2

입 없는 새는 뿌리 없는 ‘돌’(불면증 3)로 변한다. 이미 가슴은 굳어져 버린 것이다. 나무 밑에 구르는 돌처럼 잠의 발 뿌리에서 생각들은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비상도 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구를 뿐이다. 생각은 가슴에 둥지를 틀었지만 그 가슴에는 그늘도 없어 쉼이 없고 안식이 없다. 구원은 햇살로부터 온다. 해가 떠야 괴롭히던 생각들은 바르르 떨며 나간다.

일기장 행간에 못 들어간 생각들이

누구도 묻지 않기에
말 않고 지냈더니

제 길을
못 찾아가고
머리 속에서 헤맨다
- 쓰지 못한 일기 

생각들은 일기장의 행간에도 들어가지도 못한다. 누구도 묻지 않기에 말을 않고 지냈더니 생각들은 길을 못 찾아 헤매인다. 생각은 ‘그리움이 익으면 슬픔이 되’(별빛 10)고 ‘미움도 / 서둘지 않으면 / 그리움이 되는’(세월 7)법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묻지도 않고 말도 않는다. 수다와 밀서 그리고 말을 하지 않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입이 없는 것들에 입을 달아주고 수다스러운 것들은 입을 달아 주지 않는다. 그렇기에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나에게 깊은 잠은 ‘계절의 흰 손이 다둑혀 깊은 잠을 재우니’(겨울 등반길에서 2)같이 자연의 품안에서 이루어진다.

3 시에 대한 자기 반영적 글쓰기와 동시조에 대한 시도
‘시조는 나를 이끌어주는 벗이자 등불 같은 동반자가 됩니다’(시집, 동양의 뜨락, 자서)라고 말하는 최지형 시인은 시에 관한 메타적 시쓰기를 한다. 시에 대한 시쓰기인 것이다. 일종의 시로 쓴 창작법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제목만 보아도 <잘생긴 시에게>, <겨레시조 창을 열며 - 문화유산의 해>, <시조 쓰는 밤이면>, <밤을 지샌 시에게>, <시조 밭>와 같이 초기의 시조집에서부터 마지막까지 시조에 관한 시조가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창에 스며드는 저문 햇살 받아들고 / 묵은 삶을 꺼내어 말리’(사계절-등반하면서, 겨울) 던 시인은 밤에도 ‘시심이 빗 들고 앉아 가닥가닥 빗질한다’(시인의 밤)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쓴다. 

하늘을
빗질하면
저 별이 쏟아질까

보름달
안아보면
가슴 속에 별이 찰까

떠가는
조각배 타고
별을 따는 작은 손.
- 詩作

시인은 빗질을 하듯이 추억과 세상을 인식한다. 흐트러진 것을 정갈하게 정리한다는 의미이다. 최지형 시인은 동시조도 시험하고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하늘을 빗질 하면 별이 쏟아질까’와 같은 순수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손으로 별을 쓸고 가슴에는 별을 채우고 조각배를 타고 별을 따는 ‘작은 손’이다. 어렵지 않게 읽히는 그러나 멋들어진 시조이다. 작은 손은 어린아이의 손일까. 아이와 같은 마음이어야 별을 딸 수 있다. 시인의 가슴에는 작은 손이 있다. 하늘에 조각배를 타고 별을 딴다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을까. 땅을 밟지 않는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다.
위에서 시인의 동시조에 대해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시인은 시조에 있어서 ‘동시조’를 실험하고 이를 두 권의 동시조집으로 출간하였다. 아이들도 쉽게 이해하여 시조가 가진 운율적인 아름다움을 체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시의 제목에서도 <나무의 엄마는 햇님인가봐>와 같은 동요적 상상력을 엿볼 수 있고 ‘내 가슴은 꽃밭이에요 / 꽃이라면 다 좋아하니까’(나는 꽃이 좋아) 와 같은 구절은 꽃밭에서 하얀 원피스를 펄럭이며 빙그르르 도는 아이가 상상되고, ‘빗물이 발자국 밟고 / 철벅철벅 따라옵니다’ (소낙비 1)와 같은 구절에서는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철벅거리며 물장난을 치며 걸어가는 어린 남자아이의 모습이 연상된다.

바람이 가만가만
밟아도 소리가 난다

기뻐도 바스락
슬퍼도 바스락

낙엽은 공부할 때도
바스락만 배우나봐
- 낙엽

바람은 가만가만 낙엽을 밟아본다. 그래도 낙엽은 소리가 난다. 기뻐도 바스락 거리고 슬퍼도 바스락거린다. 그래서 ‘낙엽은 공부할 때도 바스락만 배우나봐’라고 생각한다. 한 번은 아이가 쓴 시를 본적이 있었다. 제목은 ‘벼’였다. ‘벼가 고개를 숙인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혼이 났을까’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의 테두리 안에서 현상을 해석한다. 그날따라 선생님께 혼이 났을까.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벼에게서 본다. 시인은 역시 아이들이 학교와 배움에 대한 테두리 안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있다.

별들이 구름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놉니다

우리들은 평상 위에 둘러 앉아서
가위, 바위, 보, 하고 놉니다

달님은 옥토끼 끌고
뒷 산 향해 갑니다.
- 여름 밤

위와 같은 동시조에서는 아이들의 놀이와 자연현상을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숨바꼭질이나 가위 바위 보와 같은 놀이는 아이들의 공간에서 행해진다. 별들은 구름하고 숨바꼭질을 한다. 아무래도 술래는 아이인 것 같다. 우리들은 평상위에 둘러앉아서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하고 논다. 별도 놀고 아이들도 놀고 달님은 전쟁놀이를 했을까. 포로로 잡은 옥토끼를 끌고 뒷산을 향해 간다. 산을 배경으로 그 아래 초가집이 있고 마당에는 평상이 있다. 밤은 즐거움, 놀이, 환상, 동화의 시간성을 가진다. 달이 앞에서 떠서 뒷산으로 넘어가면 은은한 달빛만 남고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다. 여름의 밤은 그렇게 깊어간다.

4. 나오며

최지형 시인은 시조의 정상을 '산'이라고 한다. 올라야할 높은 산이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산 아래서 머뭇거리 않는다.

시의 정상은 높고도 넓으며 아름답고 교묘하다... 아직도 설익은 언어들이 나를 앞질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거울과 같아서 시인도 시와 함께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시의 산을 향해, 제 2시집 밀서 한 장의 강, 책머리에)

시라는 것은 그것이 현대시이든 시조이든 동시이든 동시조이든 높은 정신과 넓은 아우름이 있다. 마치 보석처럼 아름답고 교묘하다. 언어와의 불화 가운데 고민하고 언어가 속에서 까만 씨로 익을 날을 기다리고, 시와 시인이 거울을 마주하고 선 것처럼 하나가 되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시인이다. 최지형 시인은 그렇게 불어오는 바람을 향하여 선다.
시인의 정신은 시의 정상을 향해 있지만, 때론 시의 우물에서 시를 긷는다. 여느 두레박질과 다른 것은 그가 밧줄을 타고 내려간다는 것이다.

시간을 벗는 저물녘
안개 깔린 우물 속에

밧줄타고 내려가는
하늘 깊은 두레박

별들과 한 밤을 새고
날이 뜨면 또 세상 밖...
- 두레박

그런데 이 우물은 땅 속으로 내려가는 두레박이 아니다. 하늘에서 세상을 향하여 내린 두레박이다. 시간을 벗어나 선녀가 목욕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듯이, 내려와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려오지 않으면 날개옷을 잃은 당황함도, 언니와 어머니를 떠나 초가집에 살아야 하는 누추함과 아이에 대한 사랑도,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귀가의 기쁨도 알 수 없는 삶이다. 두레박을 타고 내려온 최지형 시인의 시조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시인의 정신은 산의 정상을 향하여 가고, 시인의 두레박에 꿈과 전설과 신화 같은 시조가 가득히 길어 올려지길 기대하며 이만 글을 맺는다.



시인의 작품세계, 다시 읽고 싶은 시조
Total 13 [ 날짜순 / 조회순 ]

13 연(蓮)바람           09-19 운영자
다시 읽고 싶은 시조 - 정순량 연蓮과 바람 정 완 영 옛날 우리 마을에서는 동구 밖에 연蓮밭 두고 너울너울 푸른 연잎을 바람결에 실어 두고 마치 그 눈부신 자손들 노니는 듯 지켜봤었다. 연蓮밭에 연잎이 실리면 연蓮이 들어왔다 하고 연蓮밭에 연蓮이 삭으면 연蓮이 떠나갔다 하며 세월도 인심의 영측盈仄도 연蓮밭으로 점쳤었다. 더러는 채반만하고 더러는 멍석만한 직지사 인경소리가 바람타고 날아와서 연蓮…

12 윤회輪廻 (정 재 열)           03-13 운영자
한휘준 ·아호: 설봉雪峰 ·시조문학 작가상, 시세계 작가상, 달가람문학상 ·시조문학 문우회 회원, 월하시조문학 동인, 인사동시인들 동인 ·중앙대 예술대학원 詩마루동인, 서정시마을 *淸士村시사랑 동인 ·한국시조시인협회 /도봉문인협회 ·창작시집 「사랑 그 아름다운 말」 윤회輪廻 정 재 열 허공에 턱을 괴고 한 생을 돌아본다 봄 햇살 가을 서리 하나같이 보시였네 이제는 내어줄 차례 소신…

11 이태극-산딸기           02-21 운영자
이근구 ·월간 모던포엠, 강원시조시인협회 고문 ·사)시조사랑시인협회 부이사장, 사)시조문학진흥회 자문위원 ·강원문인협회, 시조문학문우회 이사 ·시조집 「들꽃 동행」외 다수 ·수상 [한국시조문학상] 외 다수 산딸기 이 태 극 골짝 바위 서리에 빨가장이 여문 딸기 까마귀 먹게 두고 산이 좋아 사는 것을 아이들 종종쳐 뛰며 숲을 헤쳐 덤비네. 삼동을 견뎌 넘고 삼춘을 숨어살아 뙤약볕 이 …

10 성불사의 밤           02-21 운영자
정재호 ·동아일보 신춘문예당선(1962) ·시조집 「제3악장」, 「바람 속에 피는 꽃」 ·시집 「모과」, 「마당」, 「천치가 부르는 노래」 성불사의 밤 이은상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댕그렁 울릴 제면 더 울릴까 맘 졸이고 끊일 젠 또 들릴까 소리나기 기다려서 새도록 풍경소리 데리고 잠 못 이뤄 하노라 …

9 고향보다 더 먼 고향           02-20 운영자
고향보다 더 먼 고향 정 완 영 고향을 찾아가니 고향은 거기 없고 고향에서 돌아오니 고향은 거기 있고 흑염소 울음소리만 내가 몰고 왔네요 고향을 떠나 온지 반백년이 지났다. 마을 앞 신작로는 아스팔트 옷 을 입고 으스대며 내달리고 손잡고 줄을 섰던 초막들은 소식조차 끊어 진지 오래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낯선 이 뿐이고 코흘 리개 친구들은 어디에 숨었는지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

8 이은상-고향생각---이근구 (국시조사랑시인…           09-24 운영자
다시 읽고 싶은 시조 - 이근구 고향 생각 이 은 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로 나갔더니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 거리오. 고개를 수그리니 모래 씻는 물결이요 배 뜬 곳 바라보니 구름만 뭉기뭉기 때 묻은 소매를 보니 고향 더욱 그립소. *1932에 수록 우리가 오래 전부터 흔히 쓰는 말로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란 말이 있다. 다시 읽고 싶은 시조로 돌…

7 봄, 새벼리/김정희--최오균           06-12 운영자
다시 읽고 싶은 시조 - 최오균 봄, 새벼리* 김 정 희 그 약속 잊지 않고 돌아온 화공들이 채색을 하느라고 붓놀림이 바쁘다 밤사이 그린 수채화 꽃대궐이 열두 채. 그 약속 지키느라 돌아온 악사들도 이 쪽 저 쪽 숲에서 고운 목청 견준다 냉천사 능수 벚꽃도 들썩이는 어깨춤. *새벼리 : 진주 8경중의 하나인 산의 이름. 지난 3월 마지막 토요일, 나는 전주시 교동에 위치한 고하문학관을 …

6 김영환의 작품세계           10-14 운영자
[김영환 시인의 작품세계] 1. 산가 창밖에 남새밭은 오이순이 돋아나고 푸른 산 머리위로 흰 구름 넘나든다 민박촌 오월의 아침 홰를 치는 닭 울음. 2. 고향길 …

5 최지형 시인의 작품세계           10-14 운영자
어젯밤 비가 와서 무슨 말을 했기에 오늘 아침 꽃들이 쓰러져서 울까요 -최지형 시인의 작품세계- 정경은(문학박사) 한 시인이 있다. 그녀는 현재 살고 있는 집에서 오랫동안 머물렀으며 그곳을 사랑한다. 그녀는 산을 좋아하여 자주 오르며, 산에서 들리는 소리와 풀들의 수다에 귀를 기울인다. 길가에 핀 꽃이나 정원에 핀 꽃들과도 눈을 맞춘다. 산사에서 흘러나오는 승려들의 음성에도 귀를 열어둔다. 또한 추수 때와 저무는…

4 최언진           10-14 운영자
***길 최언진 길이 없다 울며불며 머리 싸맨 친구에게한 마디 못 건네고 등만 쓸고 돌아오다입속에물고 있던 말허공에다 쏱는다 어디를 내딛어도 그건 바로 길이여슬픔도 길이 되고 오기도 길이 되고길이란묘한 거여서온 세상이 길이여    ***촌부일기 벌레라고 잡초라고 악물고 제거하며 내 맘에 드는 곡식 가려가며 심었어. 서로들 영역 다툼에 피터지게 싸웠지. 편애…

3 단련된 감성과 질박한 수사[고두석 시인의 …           10-14 운영자
단련된 감성과 질박한 수사 ―고 두석 시인의 작품세계― 김 병 희 (문학박사) 1. 바야흐로 모든 것이 무르익는 계절이다. 따스하기만 하던 햇살이 어느덧 뒷덜미에서 뜨겁게 이글거리고, 새로 첫 장을 넘긴 도톰하던 달력도 여러 장 뜯겨나간 마당에, 신록이 무르익어 풍성한 초록은 우리의 눈자위를 싱그럽게 만든다. 시인들이 작품을 구상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언제쯤일까. 여름이란 계절이 사방에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

2 세상의 중심을 세우는 남다른 기준-김명호…           06-06 운영자
세상의 중심을 세우는 남다른 기준 -김명호 시인의 작품세계- 정경은(문학박사) 김명호 시인의 시조를 읽고 있다.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시란 무엇일까 그리고 이 시인에게 시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는다. 저마다 생긴 모습이 다르듯이 시인들마다 시의 모습이 다르고 시인들에게 갖는 시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이다. 김명호 시인에게 시란 세상을 향…

   김명호시인의 작품세계           10-14 운영자
새우젓 김명호 새우젓 풍겨드는 콧등 시린 살 냄새 젓 단지 머리 이고 종종걸음 시오리 일 년 내 보릿고개를 끌고 넘던 울 엄니. 샘통* 가을이 나간 자리 철새들 밀물인데 못다 푼 단 자리 셈이 지표를 뒤집어서 삼시(三時)를 잃은 나그네가 혼절을 넘나든다. 저 장관을 길러 오는 노상주차장을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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